치대 본과 2학년, 타 대학 같았으면 대빵노릇을 할 나이이건만 하늘같은 선배님들이 줄줄이 계시니 늘 네- 선배님, 알겠습니다 선배님 하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선배님들 시다노릇을 하루종일 하고나면 긴장도 풀리고 피곤이 온몸으로 밀려와서 교실마루바닦에 벌러덩 누운채로 땡삐같은 시골 모기들의 성대한 잔칫상을 벌여주곤 했지요. 학교측의 연례행사로 여름방학 때마다 농촌마을에 의료봉사를 일주일씩 떠나곤 했어요. 5,6학년 교실은 진료실, 3,4학년 교실은 여자들 숙소, 1,2학년교실은 남자들 숙소 그렇게 사루비아꽃이 빨간 작고 예쁜 학교에서 우리들은 의욕적으로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을 실천에 옮기면서 뿌듯해 하던 어느날 아래위 합쳐서 이가 5개 밖에 안 남은 할아버지가 오셔서는 이가아파 죽겠으니 있는 건 몽땅 다 빼달라 하셨어요. 이를 그렇게 한꺼번에 다 빼면 큰일나세요. 오늘은 이거 제일 많이 흔들리는 걸로 하나만 빼 드릴께요. 큰일은 무슨? 왔다갔다하기 구챦어. 한꺼번에 다 빼줘! 귀찮으셔도 오셔야 해요. 내일 또 오세요. 내일은 못 와 우리 아들네 배추씨 놔야햐. 그럼 모레 오세요 저희들 여기 일주일동안 있을꺼예요. 서울것들은 깍쟁이여 여시같은것들. 인심도 사납지, 늙은이가 그렇게 사정하는데도 끝내 안빼주는겨. 툭 근드리면 빠지겠구만. 뭣이 힘들다고... 힘들어서가 이니고 할아버지 몸생각해서 그러는거라고 한참을 설명을 하면 고개를 끄덕이시다가도 아이 그래두 빼줘 지들이 날 언제봤다고 내 몸 생각을 한데 허길... 아무리 꼬셔도 난 안넘어가. 나도 꾀가 있는디, 여기가 어디라고 내일 또 와. 그렇게는 못햐 할아버지를 설득하느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저를 보면서 선배들은 한마디씩 했어요. 그것도 능력이야 , 열심히 해봐 의사선생님 미모가 너무 출중하니까 그런거야. 땅거미가 운동장을 반쯤은 검게 물들였을 즈음 할아버지는 이뺀 자리에 묻었던 솜도 빼고 제가 뇌물로 드린 쥬스를 한잔 마시고는 총각선상님이 좀 빼줘. 저 여시같은 서울 깍쟁이는 말이 안통햐. 남자끼리 얘기좀 해보자고, 내가 통 시간이 없어서 그랴 툭건드리면 빠지게 생겼는디 몽창 좀 빼줘. 하루종일 제 수고를 본 선배는 더이상 설명을 하지않고 냅다 소리를 질렀어요. 할아버지 안된다면 안되는줄 아세요. 이는 그렇게 한꺼번에 다 빼는게 아녜요. 할아버지 돌아가실수도 있단 말입니다. 돌아가실수도 있다는 말에 겁이난건지 선배의 무서운 얼굴에 겁이 나신건지 그렇게도 끈질기시던 할아버지가 군말없이 일어나셨어요. 와~ 우리들은 선배의 능력에 박수를 쳤어요. 선배님 멋져요. 고릴라가 화내는데 안무서운 사람이 어디 사람이겠냐? 김예지 더운데 애썼다. 우리 시원한 맥주나 한잔씩 하러가자 가분이다 내가쏜다. 그날저녁 할아버지덕에 코가 삐뚤어진 의료봉사진 일행은 선배님 주머니가 바닥나서야 일어섰고 꼬불꼬불한 논둑길을 비틀거리면서 걷던 희순선배가 논둑밑으로 굴러떨어져서 벼를 짓이겨놓고 헤메대기를 치다가 고릴라 선배의 등에 업혀서 학교로 돌아왔어요. 새벽2시쯤 잠이들었을까. 모기야 뜯어라 나는잔다 얼마쯤 잤을까 뭔가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잠을 깼는데 운동장에 선배님들이 모여 있었어요. 아직 해도 안떳는데 새벽부터 무슨일이지... 어제 그 할아버지가 해장 술병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는 한 모금씩 마시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고 계셨어요. 선무당이 사림잡는다더니 돌팔이들이 사람잡네. 눈이 있으면 좀봐 잘난 서울 의사 선상님들 날좀 보라구. 날 이꼴로 만들어놓고 무사할줄알아. 너희들 몽땅 콩밥을 먹어야 정신들을 차리겠어. 촌놈이라고 무시했다가는 큰코다치지 암~ 그러게 누가 술을 드시래요. 술드시지 말라고 어제 주의사항 일러 드렸쟎아요. 하루종일 말씀드렸는데 이게 뭐예요. 술 드셔서 얼굴이 이렇게 부은거라구요. 할아버지! 근데 술은 왜 드셨어요? 니들이 날 촌놈이라고 무시하고 이도 하나밖에 안 빼주니까 부아가 나서 먹었다 왜 어쩔래! 니들이 언제 나 술 사줬냐. 끅~~ 고릴라 선배가 씩씩거리면서 술병을 빼앗더니 축구골대안으로 집어던졌어요. 이러다가 정말 큰일납니다. 움찔놀란 할아버지가 어 너 무서운 그놈이구나 아이구~ 의사선상님!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비시시 운동장 바닥에 드러누우시더니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어요. 반 끌다시피해서 1,2학년 남자 숙소에 잠자리를 봐드렸더니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신 할아버지가 기왕에 온김에 이 하나만 빼줘. 내 오늘은 하나만 빼고 갈께. 더 빼달라고 안해. 술주정하신게 미안하셨던지 한풀꺾인 목소리로 사정을 하셨어요. 돈은없고 치과는 멀고 자존심은 강하시고 의학상식은 전혀 없으시고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할아버지가 가엾어 보였어요. 할아버지 시장하시죠? 오늘도 이 못빼드려요. 술드셔서 염증이 심해요. 좀 나아지면 그때 빼드릴께요. 제가 저녁 사드릴 테니 가세요. 나 얼큰한 짬뽕국물이 먹고 싶은디 그래도 되남? 네~ 그러세요. 아~ 시원하다 요놈의 국물이 아주 쥑이는구만, 안주가 좋은디 소주한잔만 딱 한잔만 하면 안될까유 선상님. 안돼요. 할아버지, 술 드시면 정말 큰일나세요. 맨정신에 거길 또 언제 가나! 할아버지 댁이 어디신데요? 멀지~ 예서 십리는 족히 가야지 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한꺼번에 이를 다 빼길 원하셨구나 다니기가 힘드셔서 그랬구나. 우리들이 타고온 버스로 할아버지를 모셔다 드리고는 내일은 저희가 올테니 오시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학교로 돌아왔어요. 버스대절을 해보기는 머리털나고 처음이라며 고마워유, 고마워유를 열번도 더 하셨어요. 그렇게 며칠 할아버지댁에 왕진을 다녔어요. 산밑에 있는 조그마한집. 어릴적 동화책에서 본듯한 할아버지댁을 찾으면서 저는 동화속 주인공이 된듯한 기분으로 뿌듯한 자부심에 행복해 했어요. 정말 잘했어. 치대에 가길 정말 잘 했어. 그곳을 떠나던 날. 할아버지는 감자, 옥수수를 잔뜩 지게에 지고 학교엘 오셨어요. 제가 치과 개원을하면 할아버지 틀니를 꼭 해드리겠다고 약속을 하고 그곳을 떠났어요. 그런데 5년이 지난 지금도 개원을 못하고 있답니다. 할아버지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약속 꼭 지킬께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