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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시골 얘기(MBC Radio 0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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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176회 작성일 2007-01-13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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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시골얘기

MBC Radio 지금은라디오시대(2000. 05. 25)

안녕하세요 두분.
뿌연 흙먼지 풀풀날리면서 완행버스가 하루에 3번 돌아나가는 그런 산골에서 20년을 살고도 웬수같은 가난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콕 누르면 뽀얀물이 주르르 흐를것같은 그런 싱그러운 스물살나이에 나의 첫 사회생활은 또 그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푸르른 오월, 이맘때면 뻐꾸기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짐바리 자전거를 타고 농협지소로 출근을 했어요.
그때 겪었던 잊지못할 해프닝들을 소개할까하고 이렇게 용기를 냈습니다.
그곳에서 20년을 살면서 교납금 고지서를 받아든 부모님의 얼굴이 누렇게 뜨는걸 보면서 꿈많은 사춘기소녀의 가슴은 무너져 내리고 내 꿈은 자꾸만 작아져만 갔습니다.
장가못간 아들 머리에 새치가 아닌 백발이 무성해지는걸 바라보면서 연체이자라도 물라는 농협의 빚독촉을 받으면서 그렇게 버거운 삶과함께 백발이 되어가는 그곳 사람들의 가슴앓이를 겪으면서 나의 꽃다운 청춘은 흙에살리라 였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과반수 이상이 문맹인이여서 동네이장과 유지몇분하고 젊은사람, 그리고 군사지역이라 군인들만이 입출금표를 작성할 줄 알고 나머지 분들은 모두 통장과 도장만 주면 돈을 내주는 줄로 알고 계셨어요.
이무슨 개 풀뜯어먹는 소리냐구요, 한 번 들어보세요.
은행하나없는 그곳의 유일한 금고는 농협지소뿐이였는데 그곳 실정을 훤히 아는 고참언니는 주민등록번호 끝자리 4자리를 비밀번호로 하고는 온 동네사람들 통장관리를 해주고 있었어요.
“박양아~ 나 십만원만 찾아줘!” 하면, 청구서쓰고 도장 꾹찍고 알아서 비밀번호 써주고 “여기있어요, 할머니 돈 가져가세요.” 아무리 농협지소라지만 그래도 돈 관리를하는 반 은행이나 다름없는곳인데 이게 뭡니까!
서울에 있는 은행, 뭐 그리니까 예쁜까운을 입고 창구에 앉아서 띵똥 소리가나면 번호표 주세요 하면서 폼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런 내모습을 상상했었는데 고참언니를 보니까 초장부터 김새서 일할맛이 안나더라구요.
그래도 어쩝니까 예쁘게 앉아서 손님을 기다렸지요.
북어하고 마누라는 3일에 한 번씩 두들겨야 맛이라는 윗집아저씨가 오셔서는
“나 비료좀사게 돈십만원만 찾아줘!” 하시면서 통장하고 도장을 불쑥 내미셨어요.
잘해봐야지, 의욕에 불타는 저는 제대로 알려드려야겠다 싶어서 
“아저씨! 청구서 써오세요.” 했더니 “청구서? 그게뭔디?” 
“그걸 김양이 써야지 왜 내가써!” (으례히 저희가 쓰는걸로 알고계셨어요.)
“청구서는 저희가 쓰면 안돼요. 돈을찾으실분이 써주셔야죠?”
“아이 귀챦아 김양이써어.”
“안돼요 직접쓰세요.”
“왜 이렇게 뻣뻣하게굴어싸, 늘 하던대로 햐아, 김양 초짜라 뭘 모르는가본디 
여긴 그런데가 아니여 다 아부지같은 사람들헌티”
“이젠 안돼요 청구서직접쓰세요. 원래 그렇게 해야돼요”
금방이라도 화를낼것같던 아저씨가 “실은 나 까막눈이여”
하는수없이 저는 청구서를 집어들고 “아저씨! 비밀번호가 뭐예요”
“비밀번호? 그건 또 뭐여?”
“왜 있쟎아요. 4자리로 된 숫자 외우고 계시라고 한거 말이예요.”
“아- 숫자!” 하시더니 “112?????...”
“아저씨 그건 네자리가 아니쟎아요.” “꼭 네글짜여야하냐? 내가 외우는건 
군번밖에 없는디 좀 길긴 길다 알아서 잘라써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하나, 고졸인 제머리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질 않았어요.
한 번은 이런일도 있었어요.
며칠후, 밤나무집 할머니가오셔서는, “서울에서 큰회사 댕기는 우리아들이 연탄값보냈다는디, 김양아! 니가 좀 찾아줘야 쓰겄다, 이 치부책에 들었다 카드라” 하시면서 통장을 휙 던지셨어요.
“할머니 도장도 주세요”
“아구야 잊어뿌렸다야, 거냥 지장찍으면 안되겄냐?”
“그건 안돼요. 할머니”
“김양! 니, 나몰러? 뻔히알면서 뭘그랴, 그냥지장 찍자 내가 거길 또 워티게 댕겨온다냐, 아이구 난 무릎고뱅이 아파서 못가. 나 알쟎혀어 밤나무집 할마시여” 하시면서 얼굴을 제 얼굴에 바짝 갖다대셨어요.
저는 하는수없이 짐바리 자전거를 끌고나왔어요.
“할머니 여기타세요. 제 허리 꽉 잡으세요.”
까운치마 가운데를 오핀으로 꾹찔러서 반바지를 만들어 입고는 먼지풀풀나는 비탈길을 달리면서 걱정이 태산같았어요. 이러다가 조선무 알타리돼서 시집도 못가면 어쩌지. 내 팔자에 역마살이 끼었다더니만 그래서 이렇게 돌아다니나~”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밤나무골에 다녀와서는
“할머니 비밀번호 외우시죠? 저번에 꼭 외우라고 하신거 기억하세요?”
“그걸 워째 외운다냐 써준것도 못 읽는판에 난 그런거 못햐”
“할머니 돈을 찾으시려면요 통장, 도장, 그리고 비밀번호를 아셔야해요.”
“여태껏 그런거 몰라도 박양은 돈 다 찾아주던디! 새삼스럽게 왜 그랬싼디야
잉~ 김양 너는 온지가 월매 안돼서 뭘 잘 모르는 구먼. 박양은 그런거 꼬치꼬치 안물어쌌고도 알아서 척척 다 하는디 김양 너도 언릉 연습해야 쓰겄다“
그제서야 저는 왜 박양언니가 온 동네 통장 비밀번호를 알아야만 하는지 알겠더라구요.
문맹퇴치니 계몽운동니 그런건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걸 알았습니다.
어느 화창한봄날 이장댁 어머님 칠순 잔치가 있는 날이였어요.
할머님들 몇분이 연쇄점 쪽으로 가시길래 커다란 엉덩이를 잽싸게 일으켰지요.
농협지소라서 제일 쫄인 제가 연쇄점일도 함께 봐야 했거든요.
“할머니 뭘 드릴까요?”
“응~ 나 뽀얀거 한병줘”
“뽀얀게 뭐예요? 우유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유는 나도 알제. 거 뭐시냐 막걸리 맹키로 생긴놈이 달짝지근하니 먹을만 하던디... 잉 그려 키스혔다 카드라”
할머니가 노망이나셨나 갑자기 웬 키스는 또 뭐야...
뽀얗고 달짝지근한게 어디 한두개여야 말이지. 에따모르겠다
저는 음료수 병을 다들고 왔어요. 사이다,콜라,환타,밀키스 등등...
“이~  그려 바로이놈이여...” 하면서 할머니가 잡으신병은 밀키스병이였어요.
난 그만 웃음보가 터져서 끼득거리는데 이번엔 또 다른 할머니 한 분이
“김양아 난 저걸로 줘야, 간장 맹키로 시커먼 놈, 저거시 때깔은 저래도 맛은 뭐시냐 아그들말로 따봉이여 따봉, 아주 톡쏘는맛이 찌릿하당께”
날 가끔씩 골탕먹이셔도 결코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할머님들
다음날 저는 아버지가 계신 노인정에 짜릿한거(사이다), 시커먼거(콜라), 뽀얀거(밀키스) 뻘건거(환타) 음료수를 골고루 보내드렸어요. 
음료수 몇병에 감동받으신 할머님들은 퉁퉁한 저를 맏며느리 감이라면서 예뻐해 주셨어요.
“김양아! 우리 손주 키도훤칠하고 얼굴도 멀끄머니 잘 생겼는디, 너 우리 손주 며느리 해라 잉~”
“얼굴만 멀끔하면 뭐하노, 사나는 그저 돈벌이를 잘해야 하는겨, 
그려야 여자팔자가 핀한기라 암만말고 내 손주며느리하자 잉~ 내 잘해줄팅께.”
“돈벌이만 잘하면 다야? 승질이 지랄맞은디...” 손자없는 밤나무집 할머님이 한마디 하셨어요.
할머님들한테만 인기가 좋으면 뭘해요. 정작 손자들은 퉁퉁한 저한테는 눈길한번 안주고 일만보면 꽁지가 빠지게 농협문을 밀고 나가는데요.
온라인 입금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을 해도 “배달부가 버스를타고 가지않고도  이 기계통안으로 돈이 들어온다 이 말이제?
고참 신통방통하네...
그럼 우리 아들이 어저께 부쳤다는 그 돈은 어느맘때나 올랑가?” 하고 또 딴소리를 하세요.
“할머니!” 하고 제가 눈을 홀기면 
“알어 알어 그러니께 지금 그 기계통(컴퓨터) 안에 내 돈이 들어있다 이말아녀, 내말맞제?”
“네 맞아요 할머니...”
내 비록 지금은 이곳에서 살고있지만 시집은 꼭 서울로 가야지
서울로 시집가서 서울사람돼야지. 시간만 나면 되뇌이곤하지만 어디 세상일이 뜻대로 되던가요.
내 빼어난 미모에 기가 죽은건지 어쩌다가 출장나온 서울 남자들은 통퉁하고 햇삧에 그을러서 적당히 쎅시한 저한테는 눈길한번 안주데요.
짚신도 짝이있고 썪은 고등어도 짝이있다고 어찌어찌하다가 앞집 출장소에 근무하는 방위하고 눈이 맞았는데 다행이도 그 방위가 경기도 사람이라서 지금은 경기도에서 살아요.
그때는 참 많이도 지겨워 했었는데 세월탓일까요 가끔씩 그때가 몹시도 그리워요
그때 그 할머님들은 아직도 그곳에 계실까.
올 여름 휴가땐 꼭 그곳엘 가봐야겠어요. 농협지소에도, 노인정에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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